한약은 한 곳을 누르지 않습니다 — 입구가 여럿이고, 열리는 때가 다릅니다
〈약이 몸에서 하는 일〉 · 10편 중 10번째
짧은 답
약이라 하면 한 곳을 정확히 누르는 것을 떠올립니다. 한약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여럿이고, 그 입구들이 서로 다른 때에 열리며, 열린 것끼리 서로를 건드립니다. 그 층들을 한자리에 모아 봅니다.
목차
- 먼저, 한약은 무엇을 하려는 약인가
- 층 1 — 막을 그냥 통과하는 것: 정유
- 층 2 — 그 자리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 장관 점막의 채널
- 층 3 — 혈액을 안 거치고 곧장 중추로: 장의 신경
- 층 4 — 잠긴 것을 여는 곳: 장내세균
- 층 5 — 아픈 자리에서 깨어나는 곳: 산성 환경
- 층 6 — 세포의 문을 여는 곳: 이온채널
- 층 7 — 코 바깥에 있는 후각 수용체
- 층 8 — 표적에 안 가고 환경만 바꾸는 것: 장 점막
- 층이 아니라 층을 가로지르는 것 — 양이 방향을 정합니다
- 여기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 층들이 동시에 열리지 않습니다
- 그래서 왜 이게 중요한가
- 한 가지 당부
- 오해가 없도록
'약이 듣는다'고 하면 흔히 한 곳을 정확히 누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한 성분이 한 표적에 딱 붙어 한 가지 문제를 끈다 — 현대 신약의 상당수가 이런 방식으로 설계됩니다.
한약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한 첩에는 여러 약재가 들어가고, 약재 하나에도 여러 성분이 들어 있으며, 그 성분들은 저마다 몸의 다른 지점을 건드립니다. 저는 이것을 한약의 약점이 아니라 성질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성질을 저는 다층작용이라고 부릅니다.
이 글은 그동안 따로따로 말씀드린 이야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지도입니다. 각 층의 자세한 이야기는 해당 글로 연결해 두었습니다.
먼저, 한약은 무엇을 하려는 약인가
한약은 망가진 부품을 갈아 끼우는 약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몸이 스스로 수리할 수 있도록 내부 환경을 되돌리는 약에 가깝다고 봅니다. (물론 부품이 실제로 망가지는 병도 있습니다. 이분법은 곤란합니다.) 몸을 대신해 브레이크를 밟아 주는 약과, 몸이 스스로 밟게 돕는 약은 다릅니다. (몸을 대신하는 약, 몸을 깨우는 약)
그 '환경'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물리(압력·장력), 화학(산-염기), 대사, 면역, 신경, 순환 — 여러 축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대장이 아닙니다. 병마다 먼저 쏠리는 축이 다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갈라집니다. 축은 약이 가서 닿는 자리이고, 그러면 어떻게 거기까지 가느냐는 질문이 남습니다.
흔한 그림은 이렇습니다 — 먹으면 장에서 흡수돼 혈액을 타고 표적으로 간다. 저는 이것을 여럿 중 한 길로 봅니다. 입구가 하나면 아무리 끝이 갈라져도 목이 하나인 깔때기이지 층이 아닙니다.
아래가 제가 보는 그 입구들입니다.
층 1 — 막을 그냥 통과하는 것: 정유
가장 먼저 놓아야 할 길이 이겁니다. 흡수도, 혈액도 거치지 않는 길이니까요.
세포를 둘러싼 막은 기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유처럼 기름에 잘 녹는 성분은 이 막을 문을 거치지 않고 그냥 통과합니다. 운반해 줄 무언가가 필요 없습니다.
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먹는다 → 흡수된다 → 혈액을 탄다 → 표적에 간다"는 그림 자체를 비켜 가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이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길 하나가 보여 줍니다.
층 2 — 그 자리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 장관 점막의 채널
아직 흡수되기 전인데 신호는 이미 갑니다. 성분이 장관 점막 세포의 문(채널)을 지나가면서 직접 두드립니다.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몸에 말을 겁니다.
층 3 — 혈액을 안 거치고 곧장 중추로: 장의 신경
장에는 신경이 깔려 있고, 그 신경은 뇌로 올라갑니다. 장에서 읽은 신호가 혈액을 타지 않고 그 길로 곧장 중추에 닿습니다.
약을 먹자마자 속이 편해지는 느낌이 오는 때가 있습니다. 성분이 혈액을 타고 돌아 뇌에 갔다기엔 너무 빠릅니다. 다른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층 4 — 잠긴 것을 여는 곳: 장내세균
한약재의 유효 성분 중에는 당이 붙어 '잠긴' 형태로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여는 것은 약이 아니라 장에 사는 미생물입니다. 그래서 같은 약도 장이 다르면 다르게 듣습니다.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 장이 켜 주어야 작동하는 약)
잘 알려진 길입니다. 다만 여럿 중 하나입니다. 이 길만으로 한약을 설명하면 입구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층 5 — 아픈 자리에서 깨어나는 곳: 산성 환경
염증이 생긴 자리는 젖산이 쌓여 산성으로 기웁니다. 그 산성이 장벽을 느슨하게 하고, 잠겨 있던(포합된) 성분을 그 자리에서 풀어 국소적으로 깨웁니다. 약이 아픈 곳을 골라 깨어납니다. (약이 아픈 곳에서 깨어나는 이유)
층 6 — 세포의 문을 여는 곳: 이온채널
생강·계피·박하·산초 같은 재료의 성분은 세포막의 '문'(이온채널)에 열쇠처럼 꽂혀 신호를 만듭니다. 생강의 매운 성분이 고추의 캡사이신과 같은 자리에서 그 문을 연다는 것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한약재의 매운맛은 왜 몸에 작용하는가)
층 7 — 코 바깥에 있는 후각 수용체
우리 몸의 후각 수용체는 코에만 있지 않습니다. 혈관과 장을 비롯한 여러 조직에서 같은 종류의 수용체(이소성 후각 수용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냄새를 맡는 것과는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수용체들이 몸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이제 밝혀지는 중입니다. 코 안의 후각세포와는 다른 경로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식물의 향 성분이 코가 아닌 곳에서도 읽힐 자리가 있다는 뜻이라, 저는 이 갈래를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층 8 — 표적에 안 가고 환경만 바꾸는 것: 장 점막
앞의 길들과 결이 다릅니다. 여긴 성분이 어딘가에 가서 붙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장의 환경 자체를 고쳐 점막 세포가 살아나게 하는 쪽입니다. 표적을 누른 게 아니라 자리를 고친 것이고, 그러면 그 자리에 사는 세포가 스스로 회복합니다. 몸에서 면역세포가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장이라, 이 자리를 고치는 일이 면역의 바탕과 이어집니다. (면역의 기준선은 어디서 정해지는가)
그리고 이 길은 느립니다. 며칠이 걸립니다. 뒤에서 이야기할 '시간이 어긋난다'는 대목이 여기서 나옵니다.
층이 아니라 층을 가로지르는 것 — 양이 방향을 정합니다
호메시스는 위의 층들과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입구가 아니라 모든 층에 걸리는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극이 몸의 방어·회복 반응을 오히려 깨우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센 약이 늘 좋은 약은 아닙니다. 어느 선을 넘으면 이로움은 멈추고 부담만 올라갑니다. (센 약이 좋은 약일까)
같은 성분이 양에 따라 방향을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층마다 "여느냐 마느냐"만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가 함께 있습니다.
여기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 층들이 동시에 열리지 않습니다
층을 여덟 개 늘어놓으면 부챗살처럼 보입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리는 때가 다릅니다. 막을 그냥 통과하는 길은 입에서 몇 분 만에 열립니다. 장의 신경을 타는 길도 빠릅니다. 그런데 장내세균이 열어 줘야 하는 길은 몇 시간이 걸리고, 점막 환경을 바꿔 세포를 살리는 길은 며칠에 걸쳐 갑니다.
그리고 서로를 건드립니다. 먼저 열린 길이 나중 길의 조건을 바꿔 놓습니다. 감초가 좋은 예입니다 — 감초는 달이는 솥에서 다른 약재가 우러나는 것에 영향을 주고, 장관 점막에서 다른 약재가 흡수되고 대사되는 과정을 고르고, 신경에서 나트륨·칼륨 조절에 손을 댑니다. 한 약재가 세 층에서, 서로 다른 때에 일합니다. 그리고 감초가 다른 약의 흡수를 바꾸면 그 약의 작용이 바뀌고, 그러면 감초가 놓인 자리의 조건도 따라 바뀝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그래서 한약은 한 줄로도, 부챗살로도 못 그립니다. 입구가 여럿이고, 시간이 어긋나고, 서로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왜 이게 중요한가
오래된 병은 대개 한 축만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축이 함께 흔들려 있습니다. 그런 상태를 되돌리려면 여러 자리를 조금씩 미는 편이, 한 축을 세게 미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이 '다성분·다표적'이라는 성질은 최근 약리학에서도 다루는 주제입니다.
한 가지 당부
이 지도에 나온 성분과 약재의 이름은, 그것을 직접 구해 쓰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처방은 여러 약재를 그 사람의 치우친 축에 맞춰 설계하는 일이지, 성분을 임의로 골라 취하는 것과 다릅니다. 제가 성분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오직, 약이 내 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실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없도록
'여러 층에서 작용한다'는 말이 '아무 데나 듣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 어느 층에서 먼저 어긋났는지를 사람마다 다르게 읽고, 거기에 맞춰 처방을 설계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각 층의 기전은 실험에서 확인된 것이고, 이 층들을 하나의 틀로 묶어 읽는 것은 제가 임상에서 세운 관점입니다.
참고한 자료
- 장내세균이 한약 성분을 활성형으로 바꾸며, 그 능력에 개인차가 크다 — American Journal of Chinese Medicine, 2011
- 생강·계피·박하 등의 성분이 이온채널에 작용하는 방식 — Current Neuropharmacology, 2008
- 후각 수용체가 코 바깥의 여러 조직에서 하는 일 — Physiological Reviews, 2018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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