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같은 처방을 드렸는데 어떤 분은 일주일 만에 달라졌다고 하시고, 어떤 분은 한 달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같은 약, 같은 용량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체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 "체질"이라는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상당 부분이 장(腸)에서 갈립니다.
한약은 먹은 그대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한약재의 유효 성분 상당수는 당(糖)이 붙어 있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이 상태로는 몸이 잘 쓰지 못합니다.
이 성분들은 위와 소장을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다 대장에 사는 미생물을 만나면서 비로소 당이 떨어져 나가고, 몸이 흡수할 수 있는 활성 형태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한약은 장내 미생물이 열쇠를 돌려 주어야 문이 열리는 약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여러 현상이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장이 좋지 않은 분에게는 좋은 약도 제 힘을 내지 못합니다. 열쇠를 돌려 줄 미생물이 충분하지 않거나 구성이 흐트러져 있으면, 성분은 활성화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립니다.
항생제를 최근에 오래 쓰신 분은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항생제는 병을 일으키는 균만 골라 없애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시기에 따라 반응이 다릅니다. 장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식사, 스트레스, 수면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소화를 먼저 묻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오신 분께, 잠이 안 와서 오신 분께, 손발이 차서 오신 분께 저는 거의 예외 없이 소화와 배변을 묻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의아해하십니다. "허리 때문에 왔는데 왜 대변 얘기를 하시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약이 작동할 조건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장이 나쁜 상태에서 아무리 정교한 처방을 설계해도, 약은 제 몫을 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목표한 치료로 곧장 가는 대신, 장을 먼저 정돈하는 처방을 앞에 둡니다.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름길입니다.
둘째, 장 자체가 원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장은 몸에서 면역세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고, 자율신경과 촘촘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긴장하면 배가 아프고, 장이 나쁘면 잠이 얕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럼 유산균을 먹으면 되나요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장내 미생물은 몇 가지 균을 넣어 준다고 곧바로 바뀌는 단순한 생태계가 아닙니다. 무엇을 넣느냐보다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는지, 얼마나 자주 먹는지, 소화관이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그리고 자율신경이 안정되어 있는지가 함께 작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장을 다룰 때 균을 넣는 일보다, 장이 움직이고 회복할 조건을 만드는 데 집중합니다.
정리하면
- 한약의 유효 성분은 상당수가 장내 미생물의 대사를 거쳐야 활성화됩니다
- 그래서 장의 상태가 약효를 좌우합니다
- 반응이 더딘 것이 약이 나빠서가 아니라, 약이 깨어날 조건이 부족해서일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저는 어떤 증상으로 오시든 소화와 장을 먼저 살핍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명은 연구로 상당 부분 뒷받침되지만, 사람마다의 반응 차이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유전적 대사 능력, 복용 시간, 병의 경과 시기도 함께 작용합니다.
다만 반응이 더딜 때 "이 약은 나한테 안 맞나 보다"라고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약이 문제가 아니라 순서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순서를 함께 찾는 것이 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