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켜 주어야 작동하는 약 — 치자 한 가지를 끝까지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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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사람마다 다르게 듣는다"는 말을 저는 여러 번 썼습니다.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그런데 그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갈리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설명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약재 하나를 골라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치자입니다. 김치에 물들이는 그 노란 색, 단무지의 노란 색을 내는 그 열매입니다.
이 한 가지를 따라가면, 제가 몸과 약을 어떻게 보는지가 거의 다 드러납니다.
먼저, 치자는 그대로는 거의 듣지 않습니다
치자의 주된 성분은 게니포사이드라는 물질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은 잠겨 있는 형태입니다. 정확히는 활성 물질에 당(糖)이 하나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당이 붙어 있는 형태를 배당체라고 부릅니다.
당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이 물질이 몸 안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흡수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약은 언제 약이 됩니까.
장에 내려가서, 장에 사는 세균이 그 당을 떼어 낼 때입니다.
세균이 가진 베타-글루코시다아제라는 효소가 당을 잘라 냅니다. 그러면 잠금이 풀리고 제니핀이라는 활성 물질이 됩니다. 몸이 실제로 반응하는 것은 이 제니핀입니다.[1]
이건 짐작이 아니라 숫자로도 드러납니다. 치자 성분을 그대로 먹었을 때 몸에 흡수되는 비율은 낮은데, 장내세균의 대사를 거치면 흡수율이 몇 배로 뛴다는 것이 동물 실험에서 확인되어 있습니다.[1] 잠금을 푸는 열쇠가 장에 있다는 뜻입니다.
약을 켜는 것은 약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장에 사는 세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예측을 합니다
기전이 이렇다면, 따라오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진료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확인할 수 없는 설명은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장내세균이 무너진 사람에게는 이 약이 덜 듣습니다.
- 항생제를 최근에 오래 쓰신 분
- 설사가 오래되어 장이 헐어 있는 분
- 장이 예민해 흡수 자체가 흔들리는 분
이런 분들은 같은 약, 같은 양을 드려도 반응이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그 사람 체질" 같은 말로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잠금을 풀어 줄 세균이 부족하면 약이 켜지지 않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께는 장부터 봅니다. 약이 듣게 만들 조건을 먼저 만드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면 아무리 좋은 약도 헛돕니다. (면역력은 장에서 결정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환경입니다. 약이 듣고 안 듣고를 가르는 것도 결국 환경입니다.
켜진 다음, 이 물질은 한 가지 일만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제가 한약을 현대 약리로 설명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입니다.
제니핀은 한 군데에 가서 한 가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몸의 여러 축을 동시에 건드립니다.
| 축 | 무엇을 하는가 | 근거의 무게 |
|---|---|---|
| 면역 · 염증 | 염증 신호를 켜는 중앙 스위치(NF-κB)를 눌러, 과잉 신호물질을 줄입니다 [5] | 대부분 실험·동물 |
| 대사 · 미토콘드리아 |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열로 흘려보내는 통로(UCP2)에 작용합니다 [6] | 실험 근거 · 사람에서는 미확인 |
| 담즙 · 간 | 담즙과 빌리루빈이 고이지 않고 빠져나가도록 밀어냅니다 | 동물 · 전통적 사용과 일치 |
| 산화 · 순환 | 치자를 노랗게 만드는 색소(크로신) 자체가 산화 스트레스를 줄입니다 | 실험·동물 |
노란 색소가 그저 색이 아니라 약효를 내는 물질 중 하나라는 것 — 이런 것이 저는 재미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작용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약재가 네 개의 축을 동시에 건드립니다. 그리고 한약 한 첩에는 이런 약재가 여러 가지 들어갑니다.
저는 이것이 한약의 약점이 아니라 성질이라고 봅니다. 오래된 병은 대개 한 축만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축이 함께 흔들려 있습니다. 그런 상태를 되돌리려면 여러 축을 동시에 조금씩 미는 편이, 한 축을 세게 미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다만 저는 이 말을 자랑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바로 이 성질 때문에 한약은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이 무엇을 했는지 가려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약점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기간을 정합니다
기전을 여기까지 따라오셨으면, 왜 제가 끊을 시점을 함께 정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치자는 여러 해에 걸쳐 아주 오래 복용하는 경우 주의가 필요합니다. 장으로 가는 정맥에 변화가 생긴 사례가 사람에게서 보고되어 있습니다(장간막정맥경화증). 일본에서 이 병으로 확인된 분들을 조사한 연구를 보면, 누적 복용량이 대개 5,000g을 넘고 평균 복용 기간이 11년가량이었습니다.[2][3] 그보다 적게·짧게 드신 분들에게서는 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핵심은 '양'이 아니라 '기간'입니다. 몇 주 드시는 것과 몇 년을 쉬지 않고 드시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제가 약을 시작할 때 언제 끊을지를 함께 정하는 이유입니다. 막연한 신중함이 아니라, 숫자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양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동물 실험에서 부담이 나타나기 시작한 양은, 약효를 보려고 쓰는 양보다 훨씬 높은 구간이었습니다.[4] 그러니까 "양을 정한다"는 말도 막연한 조심이 아니라 숫자가 있는 선긋기입니다.
그리고 여기가 제가 이 약재를 흥미롭게 보는 지점입니다. 부담을 만드는 물질도 제니핀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염증을 가라앉히고 담즙을 밀어내는 바로 그 물질입니다.
약효를 내는 물질과, 지나쳤을 때 부담이 되는 물질이 같습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기전으로, 양과 시간만 달리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안전을 만드는 것은 약의 출신이 아니라 양과 기간과 그 사람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제가 "천연이라 안전하다"는 말을 쓰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씁니다
이 기전을 알기 때문에, 저는 치자를 쓸 때 몇 가지를 정해 놓습니다.
양을 정합니다. 많이 쓰면 더 듣는 약이 아닙니다. 어느 선을 넘으면 이로움은 멈추고 부담만 올라갑니다. (센 약이 좋은 약일까)
기간을 정합니다. 시작할 때 언제 끊을지를 함께 정합니다. "좋아질 때까지 계속"은 계획이 아닙니다. 방금 보신 대로, 이 약재의 위험은 오래 쓰는 데서 옵니다. (약을 언제 끊어야 하는가)
간을 봅니다. 간이 이미 약한 분, 간 수치가 올라 있던 분, 간에 부담을 주는 다른 약을 드시는 분 — 이런 분께는 다르게 판단합니다.
장을 함께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약은 장이 켜 주어야 작동합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
제가 성분과 기전을 이만큼 자세히 쓰는 이유는, 약이 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과 혼자 판단하는 것은 다릅니다.
- 같은 약재라도 어떻게 처리된 것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력이 남는 규격품을 씁니다. (그 약재는 어디서 왔습니까)
- 얼마나, 얼마 동안 쓸지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 그리고 방금 말씀드렸듯이, 이 약의 위험은 효과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많이 오래 쓰면 그만큼 위험도 커집니다.
노랗게 물드는 예쁜 열매이고 음식에도 쓰입니다. 그래서 더 만만해 보입니다. 만만해 보인다고 만만한 약은 아닙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병원에 먼저 가야 하는 경우
간과 담즙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아래는 반드시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떤 한약을 드시든, 아래가 나타나면 약을 멈추고 즉시 병원으로 가십시오.
- 눈의 흰자나 피부가 노랗게 변함
- 소변이 콜라처럼 진해짐, 대변 색이 허옇게 변함
- 오른쪽 윗배가 아프거나 묵직함
- 심한 피로, 입맛이 뚝 떨어짐, 메스꺼움이 계속됨
- 온몸이 가려움
그리고 한약을 여러 해에 걸쳐 오래 드셔 오신 분이라면, 아래도 그냥 넘기지 마십시오.
- 배가 반복해서 아프고, 더부룩하고, 설사가 잦다
- 이 증상이 몇 달 이상 이어진다
흔한 소화 증상처럼 보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장의 정맥이 굳는 병은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래 드신 이력을 반드시 의료진에게 말씀하십시오. 그 정보가 없으면 진단이 늦어집니다.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좋아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명현반응이라는 말 편에서도 같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간 질환을 앓고 계신 분, 간 수치가 올라 있는 분은 한약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알려 주십시오. 저는 그 정보 없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이 글에서 제가 어디까지 확실하고 어디부터 불확실한지, 구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확립된 것: 게니포사이드가 배당체이고, 장내세균의 효소가 당을 떼어 내야 제니핀이 된다는 것. 이것은 잘 확인된 사실입니다. 사람마다 장내세균이 다르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실험·동물 단계인 것: 제니핀이 염증 스위치를 누르고, 미토콘드리아의 통로에 작용하고, 산화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것 — 대부분 세포와 동물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같은 일이 같은 크기로 일어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에서 보고가 쌓인 것: 장기 복용에서의 장간막정맥경화증. 이것은 세포나 동물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확인된 것이라, 이 글에서 무게를 두어 말씀드린 부분입니다. 고용량·장기 복용에서의 간 부담도 사례와 동물 연구가 함께 있습니다.
제 해석인 것: "여러 축을 동시에 미는 것이 오래된 병에 유리하다"는 것, 그리고 "약이 듣지 않는 이유를 장의 조건에서 찾는다"는 것 — 이것은 제가 임상에서 세운 틀입니다.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는 섞이면 안 됩니다. 섞으면 그럴듯해지지만, 그럴듯한 것과 사실인 것은 다릅니다.
치자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 봤습니다.
잠긴 성분이 있고, 그것을 여는 세균이 있고, 열린 물질이 여러 축을 동시에 건드리고, 그 축들 중 하나에서 이로움과 위험이 함께 나옵니다.
한약이 신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경로를 따라 듣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체적인 경로를 따라 해롭기도 합니다.
저는 이 경로를 보고 씁니다. 경로를 알면, 양과 기간을 정할 수 있습니다.
근거 — 이 글이 딛고 선 자료
위에서 붙인 번호는 아래 자료를 가리킵니다. 앞의 '정직하게 말씀드리면'에서 나눈 네 단계와 함께 읽어 주십시오. 자료가 있는 것과, 제가 임상에서 세운 틀은 다릅니다. 자료는 성분과 기전, 그리고 위험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쓸지는 제 판단입니다.
- Effects of intestinal microbiota on the bioavailability of geniposide in rats. Journal of Agricultural and Food Chemistry, 2014. — 게니포사이드가 장내세균의 대사를 거쳐야 흡수·활성화된다는 것, 그 흡수율이 장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것. https://pubs.acs.org/doi/10.1021/jf502557f
- Nagata Y, et al. Involvement of herbal medicine as a cause of mesenteric phlebosclerosis: results from a large-scale nationwide survey. Journal of Gastroenterology, 2016. — 일본 전국 조사(환자 222명). 치자(산치자)를 함유한 한약의 장기 복용이 장간막정맥경화증과 관련됨을 보고.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00535-016-1218-9
- Nagata Y, et al. Total dosage of gardenia fruit used by patients with mesenteric phlebosclerosis. BMC 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2016. — 이 병으로 확인된 분들의 치자 누적 복용량은 대개 약 5,000g 이상, 평균 복용 기간 약 11년.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4940942/
- Dose-related liver injury of geniposide associated with the alteration in bile acid synthesis and transportation. Scientific Reports, 2017. — 간 손상은 약효를 보려고 쓰는 양보다 훨씬 높은 용량에서 나타났고, 담즙산 대사 교란과 관련됨.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09131-2
- Genipin alleviates LPS-induced acute lung injury by inhibiting NF-κB and NLRP3 signaling pathways. International Immunopharmacology. — 제니핀이 염증 신호(NF-κB·NLRP3)를 누른다는 실험·동물 근거.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1567576916301989
- Genipin-induced inhibition of uncoupling protein-2. PLoS ONE, 2010. — 제니핀이 미토콘드리아의 UCP2에 작용한다는 것. https://journals.plos.org/plosone/article?id=10.1371/journal.pone.0013289
위 자료 가운데 사람에게서 직접 확인된 것은 2·3번(장간막정맥경화증)입니다. 1·4·5·6번은 대부분 세포·동물 단계의 근거입니다. 이 무게 차이를 저는 본문에서 그대로 밝혔습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