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켜 주어야 작동하는 약 — 치자 한 가지를 끝까지 따라가 봅니다
짧은 답
치자의 주성분은 잠긴 형태입니다. 장에 사는 세균이 당을 떼어 내야 비로소 활성물질이 됩니다. 약을 켜는 것은 약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입니다. 그리고 약효를 내는 바로 그 물질이, 지나치면 간을 상하게 합니다.
치자는 김치와 단무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그 열매입니다. 음식에도 쓰이니 만만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몸에 들어가서 곧바로 약이 되지 않습니다. 약이 되기까지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하고, 그 단계를 맡는 것은 약이 아니라 드시는 분의 몸입니다.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이 노란 열매가 어떻게 약이 되는지 보겠습니다.
잠겨 있는 성분
치자의 주된 성분은 게니포사이드입니다.
이 물질은 잠겨 있는 형태입니다. 활성 물질에 당(糖)이 하나 붙어 있는 상태 — 이런 형태를 배당체라고 부릅니다. 당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흡수가 잘 되지 않고, 힘도 약합니다.
잠금이 풀리는 곳은 장입니다. 장에 사는 세균이 가진 베타-글루코시다아제라는 효소가 그 당을 잘라 냅니다. 그러면 제니핀이라는 활성 물질이 됩니다. 몸이 실제로 반응하는 것은 이 제니핀입니다.
짐작이 아닙니다. 동물에게 항생제를 써서 장내세균을 억눌러 놓으면, 이 성분이 당이 붙은 채로 혈액에 더 많이 넘어가 버립니다. 열쇠를 쥔 쪽이 사라지면 잠금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약을 켜는 것은 약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장에 사는 세균입니다.
그래서 같은 약이 다르게 듣습니다
기전이 이렇다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항생제를 최근에 오래 쓰신 분, 설사가 오래되어 장이 헐어 있는 분, 장이 예민해 흡수 자체가 흔들리는 분 — 같은 약을 같은 양으로 드려도 반응이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그 사람 체질"이라는 말로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잠금을 풀어 줄 세균이 부족하면 약이 켜지지 않습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사람에게서도 확인된 이야기입니다. 황달 환자들에게 치자가 든 약을 쓰면서, 드시기 전에 그분의 장이 이 성분을 얼마나 잘 켜는지를 미리 재 봤습니다. 잘 켜는 분일수록 실제로 담즙이 잘 흘렀습니다. 그리고 장내세균이 다양한 분일수록 잘 켰습니다. 체질이라는 말로 뭉뚱그렸던 자리에, 재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께는 장부터 봅니다. 약이 듣게 만들 조건을 먼저 만드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꾸면 좋은 약도 헛돕니다. (면역의 기준선은 어디서 정해지는가)
켜진 다음, 한 군데만 건드리지 않습니다
제니핀은 한 자리에 가서 한 가지 일만 하지 않습니다.
염증 신호를 켜는 중앙 스위치(NF-κB)를 누릅니다.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열로 흘려보내는 통로(UCP2)에도 작용합니다. 담즙과 빌리루빈이 고이지 않고 빠져나가도록 밀어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치자를 노랗게 만드는 색소(크로신) 자체가 산화 스트레스를 줄입니다. 눈에 보이는 노란색이 곧 작용하는 물질인 셈인데, 눈여겨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색소는 장이 켜 주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제니핀과는 다른 물질이고, 잠금을 풀어 줄 세균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장에서 켜져야 비로소 약이 된다"는 이 열매의 절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약재 안에서도 어떤 성분은 장을 거치고, 어떤 성분은 거치지 않습니다.
이 축들은 대부분 세포와 동물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같은 일이 같은 크기로 일어나는지는 아직 못 봤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담즙 쪽입니다. 예전 의가들은 치자를 황달에 썼습니다. 인진호탕이라는 오래된 처방에 치자가 들어갑니다. 왜 듣는지 알고 쓴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보고 썼을 것입니다. 그 처방이 왜 듣는지를 요즘 연구가 뒤늦게 따라가 밝히고 있습니다 — 제니핀이 담즙과 빌리루빈을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황달 환자 연구에 쓴 약이 바로 그 인진호탕입니다.
한 가지 약재가 여러 축을 동시에 건드립니다. 그리고 한약 한 첩에는 이런 약재가 여러 가지 들어갑니다. 오래된 병은 대개 한 축만 무너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축이 함께 흔들려 있을 때는, 여러 축을 조금씩 미는 편이 한 축을 세게 미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진료에서 세운 틀이고, 아직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로움과 부담이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부담을 만드는 물질도 제니핀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염증을 가라앉히고 담즙을 밀어내는 바로 그 물질입니다.
약효를 내는 물질과 지나쳤을 때 부담이 되는 물질이 같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기전으로 양과 시간만 달리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부담을 켜는 것도 같은 장내세균입니다. 잠금을 푸는 그 한 번의 가위질이, 이로움과 부담을 동시에 풀어 놓습니다. 그러니 이 글에서 제가 말씀드린 두 가지 — 장이 약을 켠다는 것과, 이로움과 부담이 한 자리에서 나온다는 것 — 은 사실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안전은 양과 기간, 그리고 그 사람의 조건으로 만듭니다.
양과 기간을 먼저 정합니다
양을 정합니다. 많이 쓰면 더 듣는 약이 아닙니다. 어느 선을 넘으면 이로움이 더 늘지 않고, 부담 쪽만 커진다고 봅니다. (센 약이 좋은 약일까)
기간을 정합니다. 시작할 때 언제 끊을지를 함께 정합니다. 몇 주 드시는 것과 몇 해를 쉬지 않고 드시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 시작할 때 끝을 함께 잡아 둡니다. (약을 언제 끊어야 하는가)
간과 장을 함께 봅니다. 간이 약한 분께는 다르게 판단하고, 장은 이 약을 켜는 자리라 먼저 봅니다.
성분과 기전을 이만큼 자세히 쓰는 이유는, 약이 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실 권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는 것과 혼자 판단하는 것은 다릅니다. 같은 약재라도 어떻게 처리된 것이냐에 따라 다르고, 얼마나 얼마 동안 쓸지는 사람의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약재는 어디서 왔습니까)
간이 안 좋으시거나 간 수치가 올라 있는 분은 시작 전에 알려 주십시오. 그 정보 없이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한약을 드시든 눈의 흰자나 피부가 노래지거나 소변이 콜라처럼 진해지면, 약을 멈추고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좋아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명현반응이라는 말)
치자 하나에 이런 일이 겹쳐 있습니다.
잠긴 성분이 있고 그것을 여는 세균이 있는가 하면, 그 과정을 아예 거치지 않는 성분도 한 열매 안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자리에서 일어난 일들이, 짧게 쓸 때와 오래 쓸 때 다른 얼굴로 나옵니다.
노랗게 물드는 예쁜 열매입니다. 흔하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흔한 것일수록,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쓰는 편이 낫습니다. 경로를 알면, 양과 기간을 정할 수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 먹은 치자 성분의 당을 장내세균의 효소가 떼어 내야 활성 물질이 된다는 것 — Biomedicines, 2018
- 담도가 막혀 황달이 온 환자 52명에서, 장이 이 성분을 잘 켜는 분일수록 담즙이 잘 흐르는 경향을 보였다는 연구 — Pharmacological Research, 2022
- 제니핀의 간 부담이 양과 기간에 비례하며, 끊으면 회복된다는 동물 연구 — Heliyon, 2023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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