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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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은 순하지만 약한 약이다. 많은 분이 이렇게 알고 계십니다.
저는 오래 한약을 성분과 작용의 수준에서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역설과 마주쳤습니다.
재 보면 정말 낮습니다
이건 인상이 아닙니다. 숫자로 그렇습니다.
시험관에서 효과를 내려면 마이크로몰 단위가 필요한 성분이, 사람이 먹었을 때 혈액에서는 나노몰 수준으로 나옵니다. 천 배쯤 낮습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서 한 번 멈춥니다. 이렇게 낮은데 왜 몸이 반응하는가.
그런데 질문에 전제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번 멈춰 보겠습니다. "혈액에서 나노몰"이 왜 역설로 들릴까요.
약이 혈액을 타고 표적까지 간다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제 위에서는 혈중 농도가 곧 약의 세기입니다. 그러니 낮으면 안 듣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 전제를 안 쓰는 길들이 있습니다.
정유처럼 기름에 잘 녹는 성분은 세포를 둘러싼 기름막을 그냥 통과합니다. 문을 거치지 않고, 운반해 줄 것도 필요 없이. 어떤 성분은 아직 흡수되기도 전에 장관 점막 세포의 문을 지나가면서 두드립니다. 장의 신경이 그 신호를 읽어 혈액을 안 거치고 곧장 중추로 올려보내기도 합니다.
이 길들에서는 혈중 농도가 약의 세기가 아닙니다. 재는 자리가 틀린 겁니다. 강의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복도에서 재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역설의 절반은 이렇게 풀립니다 — 혈액을 지나는 길만 재고 있었던 것. 나머지 절반은 아래에 있습니다.
먹은 그대로 듣지 않습니다 — 이건 여러 길 중 하나입니다
혈액을 지나는 길에서는, 한약이 먹은 형태로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마리가 됩니다.
유효 성분의 상당수는 배당체(配糖體)입니다. 당(糖)이 붙어 있는 형태인데, 이 상태로는 몸이 잘 쓰지 못합니다. 위와 소장을 지나 대장의 미생물을 만나야 당이 떨어져 나가고, 비로소 쓸 수 있는 형태가 됩니다.
인삼이 그렇습니다. 먹은 형태 그대로는 혈액에서 거의 잡히지 않습니다. 실제로 흡수되는 것은 장내세균이 손을 댄 뒤의 물질입니다. 이 경로는 국내 연구가 앞서 밝혀 온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마다 다릅니다. 100명의 장내세균을 조사한 연구에서, 어떤 분의 장은 당을 잘 떼어 냈고 어떤 분의 장은 거의 떼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를 가른 것은 특정 세균을 갖고 있느냐였고, 나이나 성별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같은 약을 드셔도 만들어지는 활성 성분의 양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제가 통증으로 오시든 자율신경 문제로 오시든 소화와 장을 늘 함께 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만 이건 여러 길 중 하나입니다. 이 길만으로 한약을 설명하면 입구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길은 느립니다 — 대장까지 가서 세균을 만나야 하니까요. 앞서 말씀드린 막을 그냥 통과하는 길과는 작동하는 때가 다릅니다. (한약은 한 곳을 누르지 않습니다)
낮은 농도가 약점이 아닌 이유
그래도 농도는 여전히 낮습니다. 대사를 거쳐 혈액에 들어간 뒤에도요.
여기서 호메시스(hormesis)가 등장합니다. 낮은 자극이 오히려 몸의 조절 능력을 끌어올리는 현상입니다.
이 개념을 정리한 연구자들이 짚은 대목이 정확히 우리 문제였습니다. 식물 성분이 항산화제로 직접 일하려면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농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훨씬 낮은 농도에서 효과가 납니다. 성분이 직접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의 회복 장치를 켜기 때문입니다. 세포는 약한 스트레스 신호를 받으면 방어와 수리를 가동합니다.
운동이 몸에 좋은 것도 같은 결입니다. 근육에 가해지는 적당한 스트레스가 회복 반응을 부릅니다.
세게 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면 됩니다.
한약이 비교적 안전한 것도 성분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몸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크기의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세기만 읽지 않습니다
농도만이 아닙니다. 몸은 들어오는 리듬도 읽습니다.
부갑상선 호르몬이 그 예입니다. 이 호르몬은 원래 뼈를 녹입니다. 그런데 끊어서 투여하면 오히려 뼈가 늘어납니다. 이어서 계속 주면, 양을 줄여도 여전히 녹습니다.
일하는 것은 양이 아니라 끊어 준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같은 물질인데 들어오는 방식만 달라졌고, 결과는 반대로 뒤집혔습니다.
한의학이 오래전부터 복용 시점과 간격을 따져 온 것을, 저는 이 대목과 겹쳐 읽습니다. 옛사람들이 이 화학을 알았을 리는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주느냐가 결과를 바꾼다는 것을 몸으로 알아챘고, 지금 그 자리에 이름이 붙는 중입니다. 이런 대목이 이 의학을 공부하는 재미입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농도가 낮다는 것은 약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장을 거쳐 깨어나고, 낮은 자극으로 조절력을 건드리고, 리듬을 타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약을 고르기 전에 그 사람의 장을 보고, 얼마를 언제 드실지를 함께 정합니다. (약이 아픈 곳에서 깨어나는 이유)
물론 한약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필요하면 검사나 다른 진료를 먼저 권해 드립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농도가 낮은데도 듣는다는 것이 오래 이상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봅니다. 낮아서 듣는 것에 가깝습니다. 세게 밀어붙이는 대신 몸이 알아들을 만한 크기로 말을 건네고, 나머지는 몸이 합니다.
어떤 치료를 받으시든 왜 그런지 이해하고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한약을 "옛날부터 그렇게 써 왔다"는 말로만 설명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 사람마다 장내세균이 달라, 같은 약재를 먹어도 활성 성분이 만들어지는 정도가 갈렸습니다 — PLoS One, 2013
- 식물 성분은 세게 때려서가 아니라, 낮은 농도에서 몸의 회복 경로를 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 Dose-Response, 2007
- 부갑상선 호르몬은 끊어서 줄 때 뼈를 만들고, 이어서 줄 때 뼈를 녹입니다 — Bone & Joint Research, 2017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