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아픈 곳에서 깨어나는 이유 — 산성이 된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
〈약이 몸에서 하는 일〉 · 10편 중 6번째
짧은 답
먹은 약은 온몸을 돕니다. 그런데 왜 하필 아픈 곳에서 풀릴까요. 염증이 생긴 자리는 산성이 되고, 그 산성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 장벽을 느슨하게 하고, 잠겨 있던 성분을 그 자리에서 깨웁니다.
목차
먹은 약은 온몸을 돕니다. 그런데 효과는 무너진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그 이유를 "약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의 환경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약은 온몸을 도는데, 왜 아픈 곳에서만 듣는가)
오늘은 그 "환경"이라는 말을 한 겹 더 벗겨 보겠습니다. 아픈 자리는 대개 산성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성이라는 조건 하나가, 약이 하는 일을 두 갈래로 바꿉니다.
먼저, 아픈 자리는 왜 산성이 되는가
염증이 생긴 조직은 산소가 부족해집니다. 세포는 산소가 모자라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젖산이 쌓입니다. 운동을 심하게 하면 근육이 시큰해지는 그 젖산입니다.
그래서 염증이 오래 머문 자리는 주변이 국소적으로 산성으로 기웁니다. 몸 전체가 산성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딱 그 자리, 문제가 생긴 좁은 구역이 그렇습니다.
사람의 조직에서 재어 확인된 값입니다. 그리고 이 산성이라는 조건이, 지금부터 말씀드릴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산성이 하는 첫 번째 일 — 장벽을 느슨하게 합니다
우리 몸의 상피(장, 혈관, 점막의 표면)는 세포들이 타이트정션이라는 이음매로 촘촘히 붙어 장벽을 이룹니다. 정상일 때 이 장벽은 아무거나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산성으로 기울면 이 이음매가 느슨해집니다. 장세포를 이용한 실험에서, 산성(pH 6.0) 환경에 둔 세포는 정상(pH 7.4)일 때보다 투과성이 높아졌습니다. 장벽이 헐거워진 것입니다.
장 세포를 배양접시에서 본 실험이라, 다른 조직에서도 같은지는 더 봐야 합니다.
이것은 양날의 성질입니다. 한쪽으로는, 필요한 성분이 문제가 생긴 자리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쪽으로는, 장벽이 지나치게 느슨해지면 새어서는 안 될 것까지 새어 나가 오히려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좋다/나쁘다"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자리와 정도의 문제입니다.
산성이 하는 두 번째 일 — 잠긴 약을 그 자리에서 깨웁니다
여기서부터가 제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입니다.
성분이 몸에 들어오면, 간과 장은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당이나 황산기 같은 꼬리표를 붙여 "포합"이라는 처리를 합니다. 이렇게 꼬리표가 붙은 형태는 대개 비활성입니다 — 몸이 배출하기 좋게 잠가 둔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혈액을 도는 성분의 상당수가 실은 이 잠긴 형태입니다.
그런데 염증이 생긴 산성 자리에서는 이 잠금이 풀립니다.
한 연구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염증으로 활성화된 면역세포(대식세포)는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달라지면서 젖산을 뿜어 주변을 산성으로 만듭니다. 그 자리에는 면역세포가 내놓은 탈포합 효소(β-글루쿠로니다아제)가 함께 있고, 잠겨 있던 성분(케르세틴 글루쿠로나이드)에서 활성 물질이 그 자리에서 풀려납니다. 풀려난 그 활성 물질이 바로 그 자리의 염증 신호를 누그러뜨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 주어를 정확히 해 두겠습니다. 성분을 푸는 것은 산성 자체가 아니라 효소입니다. 산성은 그 효소가 일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는 쪽입니다. 이 효소는 꽤 산성인 환경(pH 45 언저리)에서 가장 활발한데, 실제 염증 조직은 그만큼까지 내려가지는 않습니다(대개 pH 67). 조건이 갖춰지면 반응이 빨라지는 것이지, 스위치가 켜지듯 열리는 단순한 그림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 방향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은 동물에서도 확인되었습니다. 쥐에게 잠긴 형태를 넣고 그 효소를 막아 버리자, 기대했던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풀려나는 과정이 있어야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약은 잠긴 채로 온몸을 돌다가, 염증이 있는 자리에서 더 잘 열립니다. 약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열쇠(효소)와 조건(산성)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잠긴 성분을 장내 세균이 열어 주는 이야기 (같은 한약인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까), 그리고 표적을 하나의 수용체가 아니라 조직의 산-염기 상태로 본다는 이야기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 모두 같은 그림의 다른 조각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뜻하는 것
저는 이 두 가지를 한약이 몸에서 하는 일의 한 층으로 봅니다. 약은 한 곳에서 한 가지 일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 층에서 동시에 움직입니다. 산성 환경을 매개로 한 이 국소적 작용은 그중 한 층입니다.
그리고 이 층은 왜 효과와 부작용이 같은 자리에서 나오는지도 설명합니다. (약의 효과와 부작용은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약을 깨우는 것도 그 산성 자리이고, 지나치면 부담을 주는 것도 같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료실에서 확인하는 것
기전이 이렇다면, 따라오는 예측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진료실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염증이 오래 머문 자리를 안고 계신 분은 같은 약에도 반응의 결이 다르다고 저는 느껴 왔습니다. 그래서 통증이든 소화든, 그 자리의 염증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함께 봅니다. 약을 바꾸기 전에, 약이 깨어날 자리의 조건부터 봅니다.
다만 이것은 제가 진료하며 세운 틀이지, 연구로 확인된 것이 아닙니다. 조직의 산성도를 재서 한약의 반응을 예측한 연구를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검사가 진료에서 쓰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하지 마셔야 할 것
기전이 흥미롭다고 해서 특정 성분을 따로 구해 드시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성분 하나가 어느 자리에서 얼마나 풀리는지는, 그 사람의 염증 상태와 장의 조건, 함께 쓰는 다른 약재에 따라 전혀 달라집니다. 저는 이 기전을 알기에 오히려 더 조심해서, 양과 기간과 그 사람의 조건을 함께 따져 씁니다. 아는 것과 임의로 쓰는 것은 다릅니다.
각 층의 기전은 세포와 동물에서 확인된 것이고, 그것을 한약 다층작용의 한 층으로 읽는 틀은 제가 임상에서 세운 관점입니다. 지금까지의 근거도 케르세틴 같은 특정 성분 계열에서 나온 것이라, 모든 한약 성분이 이렇게 작동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고한 자료
- 염증 부위가 젖산으로 국소 산성화되는 과정 — Mediators of Inflammation, 2018
- 염증 상태의 면역세포에서 잠긴 성분이 활성형으로 풀린다 — PLOS ONE, 2013
- 푸는 효소를 막자 그 효과가 사라졌다 — 탈포합이 필요하다는 동물 실험 — PLOS ONE, 2012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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