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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온몸을 도는데, 왜 아픈 곳에서만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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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먹는 약이 어떻게 아픈 무릎을 찾아갑니까?"

진료실에서 이 질문을 받으면 저는 잠시 멈춥니다. 좋은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약은 입으로 들어가 위와 장을 지나 피를 타고 온몸을 골고루 돕니다. 무릎에만 가지 않습니다. 손끝에도 가고 머리카락 뿌리에도 갑니다.

그런데 효과는 무릎에서 나타납니다.

흔한 대답은 "약이 아픈 곳을 찾아간다"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쓰지 않습니다. 약은 길을 모릅니다.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제 대답은 반대편에 있습니다. 찾아간 것은 약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달라져 있을 뿐입니다.

무너진 자리는 무엇이 다른가

몸의 어느 자리가 오래 아프면, 그 자리는 건강한 자리와 조건이 달라집니다.

산성으로 기웁니다. 산소가 모자라고 대사 찌꺼기가 쌓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잰 값도 있습니다. 류마티스 관절의 관절액은 pH 6.0까지 내려가 있습니다. 짐작이 아니라 측정된 숫자입니다.

받는 쪽도 예민해집니다. 신호를 받는 수용체의 숫자와 민감도가 달라져, 같은 신호에도 다르게 반응합니다.

   건강한 조직                     무너진 조직
 ─────────────────            ─────────────────
  산-염기 균형 유지             산성으로 기욺 (pH 6.0까지)
  수용체 반응 안정              수용체 예민 / 둔감
 ─────────────────            ─────────────────
        ↓                             ↓
   약이 그냥 지나간다           약이 그 자리에서 깨어난다

산성이라는 열쇠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원리는 단순합니다.

한약 성분의 상당수는 몸에 흡수되면서 한 겹 옷을 입습니다. 간과 장에서 당(糖) 같은 것이 붙어, 물에 잘 녹고 잘 도는 대신 작용은 잠시 접어 둔 형태가 됩니다. 피를 뽑아 재면 대개 이 옷 입은 형태가 잡힙니다.

그 옷을 벗기는 가위가 있습니다. 염증이 난 자리의 면역세포가 내놓는 효소인데, 이 가위는 주변이 산성일 때 잘 듭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1. 무너진 자리는 산소가 모자라 찌꺼기가 쌓이고, 주변보다 산성이 된다
  2. 산성이 된 그 자리에서 가위가 잘 든다
  3. 옷이 벗겨져 작용하는 형태가 그 자리에서 풀려난다
  4. 건강한 자리는 산성이 아니므로, 대부분 옷을 입은 채 지나간다

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의 환경이 약을 깨웁니다.

동물에서 이것을 직접 확인한 연구가 있습니다. 옷 입은 형태를 혈관으로 넣었더니, 염증이 생긴 귀에서 활성형이 반대쪽 성한 귀보다 2.5배 높게 나타났습니다. 옷 입은 형태 자체의 양은 양쪽이 비슷했는데도 그랬습니다. 성분이 그 자리로 더 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더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약의 낮은 농도가 설명됩니다

저는 다른 글에서 한약의 농도의 역설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한약 성분이 혈액에 남는 농도는 현대 약물의 기준으로 보면 놀랄 만큼 낮은데도 몸이 분명히 반응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이 글의 관점을 얹으면 그 역설이 조금 풀립니다.

혈액에서 재는 농도와, 무너진 자리에서 실제로 일하는 양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피를 뽑아 재는 것은 온몸의 평균이고, 그것도 대개 옷 입은 형태입니다. 평균이 낮아도, 환경이 달라진 자리에서는 성분이 깨어납니다.

몸 전체를 고르게 밀어붙이지 않으면서 필요한 자리에서 일하는 것 — 저는 이것이 한약이 오래 복용에도 비교적 부담이 적었던 이유의 하나라고 봅니다.

다만 산-염기가 전부는 아닙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반쪽입니다. 모든 병을 산-염기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유혹을 저는 경계합니다.

몸의 조건은 여러 축이 함께 정합니다. 물리적인 굳기와 압력이 있고, 화학이 있고, 대사와 면역과 신경과 순환이 나란히 있습니다. 이 축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병마다 먼저 기울어진 축이 다르고, 하나가 기울면 나머지가 연쇄로 흔들릴 뿐입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설사가 오래되어 기운이 빠지고 손발이 차가워진 분에게는 압력의 언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장 점막의 면역이 먼저 흔들렸고, 흡수가 무너졌고, 그래서 에너지 대사가 주저앉았고, 말초 혈류가 줄어든 것입니다. 이 분에게 필요한 것은 압력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장을 안정시키고 흡수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반대로 아랫배가 팽팽해져 신경이 눌린 분에게는 물리적 축이 주인공입니다.

어느 축이 먼저 기울었는지 읽는 것 — 저는 그것이 진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치료의 목표도 부품을 갈아 끼우는 일이 아니라, 환경을 되돌려 몸이 스스로 안정되도록 돕는 일이 됩니다.

염증이 오래된 조직이 산성으로 기운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측정된 사실이고, 성분이 옷을 입었다 벗는다는 것, 산성일 때 그 가위가 잘 든다는 것도 확인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대부분은 세포와 동물에서 나온 자료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한약의 낮은 농도로 얼마나 크게 작동하는지는 아직 아무도 충분히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틀로 설명되지 않는 병도 많고, 한약으로 도울 수 없는 병은 도울 수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환자분께서 "이 약이 왜 저한테 듣습니까"라고 물으실 때, 저는 성분 이름을 대는 대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약이 선생님의 무릎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무릎이 달라져 있어서, 약이 그곳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의 환경을 지키는 일이 남습니다. 약을 끊으면 돌아오는 병이 있다면, 약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환경이 아직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참고한 자료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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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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