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조직보다 환경에서 옵니다
짧은 답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신는데, 어떤 날은 허리를 못 굽힌다면 — 그 며칠 사이에 디스크가 달라졌을까요? 모양은 어제와 같은데 아픈 정도가 다르다면, 달라진 것은 조직이 아니라 그 조직이 놓인 조건입니다. 잠·공복·추위·압력이 통증의 문턱을 움직입니다. 밤에 깰 만큼 아프거나 힘 빠짐·감각 둔화가 함께 오면 검사가 먼저입니다.
목차
"어떤 날은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신는데, 어떤 날은 허리를 못 굽힙니다."
오래 아파 오신 분들께 자주 듣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대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 며칠 사이에 뭐가 달라졌을 리는 없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디스크가 하룻밤 사이에 튀어나오거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닳은 연골이 다시 자라지도 않습니다. 연골이나 디스크의 모양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픈 정도는 다릅니다.
그 며칠 사이에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같은 몸 안에서도 날마다 다릅니다
통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오래된 통증을 가진 분들이 실제로 더 자주 부딪히는 쪽은 같은 몸 안에서의 차이입니다.
지난주에는 그럭저럭 지냈는데 이번 주에는 못 견디겠다고 하십니다. 아침에는 걸을 만하다가 저녁에 심해지기도 합니다.
그 사이에 조직의 모양이 오갔을 리는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조직이 아니라, 그 조직이 놓여 있던 조건입니다.
아프다는 신호는 조직이 보내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신호는 연골이 보내지 않습니다. 거기에 뻗어 있는 신경 끝이 보냅니다. 그리고 신경 끝은 조직의 모양을 읽지 못합니다. 자기 주변의 상태를 읽습니다.
신경을 건드리는 조건 가운데 큰 몫이 압력입니다. 밖에서 눌러 오는 압력이든, 안에 물이 차면서 미는 압력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근육이나 혈관은 늘어나거나 비켜서면서 어느 정도 자기를 지키는데, 신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압력이 이어지는 동안 신경은 계속 신호를 냅니다.
그리고 눌린 자리에는 피도 덜 갑니다. 한의학에는 불통즉통(不通則痛), 곧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지켜 온 이 문장이 지금 우리가 순환으로 설명하는 것과 만나는 데가 있습니다.
그곳의 화학적인 상태도 신호가 됩니다. 건강한 사람의 근육에 산성 용액을 넣자 아팠다는 실험이 있습니다. 다치게 하거나 염증을 만드는 자극이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조건은 아픈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잠을 설친 다음 날 온몸이 더 아프다고들 하십니다. 기분 탓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을 하룻밤 못 자게 하고 재어 보면 아픔을 느끼기 시작하는 문턱(역치)이 실제로 내려가고, 아픔을 눌러 주는 쪽의 힘도 함께 약해집니다.
잠만이 아닙니다. 오래 굶었을 때, 몹시 지쳤을 때, 몸이 식었을 때, 체액의 농도가 달라졌을 때 근육은 저절로 더 긴장합니다. 몸은 먼저 지켜야 할 쪽부터 지키고, 그 부담을 어딘가로 넘깁니다. 넘겨받은 곳이 아픕니다.
그리고 이 길은 한 방향으로만 나지 않습니다. 아픔 자체가 온몸의 신경계와 면역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말씀을 그 부위 하나의 일로 두지 않습니다.
모양이 아픔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굽은 정도가 눈에 띄게 심한데도 불편을 말씀하지 않는 분들을 실제로 봅니다. 반대로 모양에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데 오래 아프신 분들도 계십니다.
무엇이 갈랐을까요. 몸이 그 모양에 적응을 마쳤는지가 한 몫을 합니다. 신경은 익숙한 자극에는 너그럽고 새로운 자극에는 예민합니다. 그래서 같은 모양이라도 몸이 아직 거기에 맞춰 가는 중인지, 맞추기를 끝냈는지에 따라 겪는 것이 다릅니다.
다만 그 정도는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통증이 없는 성인에게 같은 자극을 되풀이한 연구를 보면 통증 반응이 무뎌진 사람이 12%, 오히려 커진 사람이 29%였고, 아무 변화가 없는 사람이 59%로 가장 많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익숙해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조직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조직은 멀쩡한데 딴 데가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찢어진 곳은 찢어진 것이고, 부러진 곳은 부러진 것입니다. 조직에 생긴 일은 그것대로 봐야 합니다. 다만 그 조직이 놓인 조건이 늘 함께 있고, 오래된 통증일수록 여러 층이 겹칩니다.
조직이냐 조건이냐를 고르는 물음이 아닙니다. 어느 층들이 함께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느 쪽 몫이 큰지를 보는 일입니다.
검사가 먼저인 경우
다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작됐거나, 쉬어도 점점 심해지거나, 밤에 잠을 깰 만큼 아프거나, 열이나 체중 변화가 함께 오거나, 힘이 빠지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같이 온다면 — 이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곳의 조건을 살피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처음의 신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떤 날은 그냥 신고 어떤 날은 허리를 못 굽힌다면, 그 며칠 사이에 달라진 것은 디스크가 아닙니다. 디스크가 놓여 있던 조건이 달라진 것입니다.
모양은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건 쪽에는 아직 손댈 데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허리 통증도 원인이 다르면 치료가 다르다는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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