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명이 바뀌어도 몸은 하나입니다
짧은 답
이번 달 달력에 진료 동그라미가 셋 — 무릎, 속, 어지럼. 이름이 늘어난 만큼 몸이 내는 신호도 늘어날까요? 오히려 겹칩니다. 기운 없음·입맛 없음·느려진 걸음은 어느 한 병에만 딸린 말이 아닙니다. 물을 것은 하나 — 지금 붙은 이름들이 지금 있는 증상을 전부 설명하는가. 며칠 사이에 정신이 흐려지거나 늘 있던 증상의 모양이 달라지면 확인이 먼저입니다.
이번 달 달력에 동그라미가 셋입니다. 무릎 때문에 한 곳, 속이 안 좋아 한 곳, 어지러워서 한 곳.
여기까지 오는 데 잘못 지나온 곳은 없습니다. 무릎이 아프면 무릎을 보는 곳으로 가고, 어지러우면 어지러움을 보는 곳으로 갑니다. 증상마다 알맞은 곳을 찾다 보면 이렇게 됩니다. 드문 일도 아닙니다. 65살이 넘으신 분들 가운데 만성질환을 둘 이상 앓는 분이 절반을 넘습니다.
같은 몸에 다른 이름이 붙는 까닭
병의 이름은 그때 그 진료실에서 보인 것을 모아 적어 둔 말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쟀느냐가 다르면 적히는 말도 달라집니다. 한 곳에서는 위 안쪽을 들여다보고 적었고, 다른 곳에서는 피에서 잰 수치로 적었습니다. 같은 몸인데 손에 쥔 것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시간이 있습니다. 3년 전에 붙은 이름과 올해 붙은 이름 사이에는 3년이 놓여 있습니다. 두 이름이 다르다면 그 사이에 몸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름들은 각각 그 시점의 몸을 제대로 담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름이 헛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름이 붙어야 무엇을 볼지, 어디부터 손댈지가 정해집니다. 진단이 자꾸 바뀌는 이유에서 이 대목을 따로 다뤘습니다.
이름이 여럿이어도 나오는 신호는 몇 가지입니다
이름이 늘어난 만큼 몸이 내는 신호도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겹칩니다.
기운이 없다, 입맛이 없다, 걸음이 느려졌다, 잠이 얕다, 자꾸 어지럽다. 나이가 들면서 불편하다고 나오는 말은 대개 이 몇 가지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몇 가지는 어느 한 병에만 딸린 말이 아닙니다. 이름이 서로 다른 여러 병이 다 여기로 나옵니다.
노인의학에서는 이런 것들을 병 이름과 따로 놓고 노인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계통에 걸친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해 하나로 나타나기 때문에, 병 분류 칸에 잘 들어가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 대표 격인 다섯 — 갑자기 정신이 흐려지는 것, 넘어지는 것, 소변을 참지 못하는 것, 눌린 살갗이 허는 것, 하던 일을 스스로 못 하게 되는 것 — 을 나란히 놓고 그 밑을 찾아본 연구가 있습니다. 다섯 군데에서 공통으로 확인된 위험요인이 넷이었습니다. 나이, 기억과 판단이 흐려진 정도, 하던 일을 스스로 해내는 힘, 그리고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가.
이 넷이 각 증후군의 원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증후군이 같은 배경을 나눠 갖고 있으니, 위로 나오는 모양도 겹칩니다. 그래서 어느 이름 밑에 넣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증상이 생깁니다.
새로 생긴 것이 있던 이름 밑으로 들어갈 때
이름이 여럿이면 새로 생긴 것도 대개 그중 하나 밑으로 들어갑니다.
무릎이 늘 아프시던 분이 요새 더 아프시면 무릎 탓이 됩니다. 속이 안 좋으시던 분이 통 못 드시면 속 탓이 됩니다. 기억이 예전 같지 않으시던 분이 며칠 헷갈리시면 그 탓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병이 그런 증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미 붙은 병명으로 새 증상을 설명하면 더 찾아보지 않게 됩니다. 환자분도 그렇게 여기시고, 가족도 그렇게 전하시고, 진료실에서도 그렇게 정리되기 쉽습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흔히 밟는 길로 따로 짚어 둡니다. 새로 생긴 증상을 이미 있는 진단 쪽으로 돌려 붙이는 것 — 진단 그림자(diagnostic overshadowing)라고 부릅니다. 누가 부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판단할 때 밟기 쉬운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물음이 하나 남습니다. 지금 붙어 있는 이름들이 지금 있는 증상을 전부 설명합니까. 설명되지 않고 남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하나는 따로 봐야 합니다.
먼저 다른 곳으로
이 물음이 특히 급해지는 때가 셋 있습니다.
며칠 사이에 정신이 흐려졌을 때. 사람이나 장소를 헷갈리거나, 하던 말을 자꾸 놓치거나, 아침에는 또렷하다가 저녁이면 흐려지기를 되풀이할 때. 원래 기억이 흐려져 계시던 분이라도, 며칠 사이에 이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신호입니다.
늘 있던 증상인데 모양이 달라졌을 때. 아픈 곳은 같은데 아픈 시간이나 세기가 달라졌거나, 없던 것이 따라올 때.
며칠 만에 달라졌을 때. 몇 달에 걸쳐 오던 것이 며칠 만에 왔다면, 그것은 그 병의 걸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있으면, 이름을 다시 세우는 일은 그 뒤입니다.
늘어놓으면 사이가 보입니다
새 이름을 하나 더 짓는다고 앞의 것들이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받으신 종이를 다 가져오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날짜를 따라 늘어놓습니다. 그러면 이름들 사이에 있던 시간이 보입니다. 소화가 먼저 흐트러졌고, 한참 뒤에 잠이 얕아졌고, 그다음에 아픈 데가 붙었다. 각 진료실은 자기가 본 날의 몸을 적었을 뿐인데, 늘어놓고 보면 그 사이가 이어질 때가 있습니다.
늘어놓는다고 이름들이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습니다. 각 이름에는 각 이름의 진료가 있고, 그 진료를 여기서 대신하지 않습니다. 늘어놓아서 보이는 것은 순서입니다. 먼저 온 것과 나중에 온 것을 갈라 놓기만 해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여러 곳에서 이 몸을 들여다본 만큼 이름도 여럿 붙었습니다. 그 기록은 모아 둘 만합니다.
다만 그 이름들이 어디서 언제 붙었든, 하루는 나뉘지 않습니다. 무릎과 속과 어지러움이 각각 다른 요일에 오지 않습니다. 한 아침에 함께 옵니다.
이름이 몇이냐를 세는 것보다, 요즘 그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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