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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자마자 느껴지는 약이 있습니다 — 성분마다 가는 길이 다릅니다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글 · 의료 내용 확인 허지영 대표원장 · 한의학 병리학 박사

짧은 답

약을 넘기자마자 뭔가 느껴진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분 탓이 아닙니다. 약재 하나에는 성분이 수십, 수백 가지 들어 있고, 그중 어떤 것은 장까지 갈 필요 없이 막을 그냥 통과합니다. 같은 약재가 빠른 길과 느린 길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다만 빠른 길을 가졌다고 빠른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을 넘기자마자 뭔가 도는 느낌이 나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기분 탓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약이 있고, 왜 그런지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됩니다.

이론대로라면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한약 성분의 상당수는 배당체(配糖體)입니다. 활성 물질에 당(糖)이 붙어 있는 형태입니다. 이 상태로는 힘이 약하고 흡수도 잘 안 됩니다. 대장까지 내려가 장내세균이 그 당을 떼어 내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물질이 됩니다. (같은 약도 장이 다르면 다르게 듣습니다)

이 길은 느립니다. 대장까지 가야 하니까요. 몇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먹자마자 느껴진다는 말은 이상합니다. 아직 장에 도착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약재 하나에 성분이 하나가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오래 오해했던 것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약재를 성분으로 가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건 배당체 약재, 저건 정유 약재, 하는 식으로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재 하나에 든 성분만 수십, 수백 가지입니다. 한 약재 안에 배당체도 있고, 정유도 있고, 지질 성분도 있습니다. 약재에 따라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기도 합니다. 한 가지만 든 약재는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이 이렇게 바뀝니다. "이 약재는 어떤 길로 가는가"가 아니라, "이 약재 안의 어느 성분이 어느 길로, 언제 가는가."

대장까지 갈 필요가 없는 성분이 있습니다

우리 세포는 기름막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인지질로 된 막입니다. 물에 녹는 것은 이 막을 통과하기 어렵고, 기름에 녹는 것은 비교적 쉽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기름 쪽 성질이 강하고 분자가 작은 성분은 이 막을 그냥 통과합니다. 대장까지 내려가 세균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정유 성분이 대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분의 이름표가 아니라 성질입니다. 두 가지 이상의 성질을 함께 가진 성분이라도, 기름 쪽 비중이 크고 분자량이 작으면 막을 빠르게 지나갑니다. 같은 계열로 묶인 성분들끼리도 이 조건에서 갈립니다.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성질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길을 정합니다.

정유는 통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정유가 빠른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신경을 자극하는 힘이 큽니다.

코 안의 후각 수용체가 반응하고, 몸 곳곳의 감각신경 수용체도 반응합니다. 막을 통과해 어딘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신호가 갑니다. 그래서 정유가 많은 약재는 반응이 빠릅니다.

신경 쪽에 쓰는 약, 반응이 빠른 약에 정유 성분이 많은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제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정유 성분이 특정 수용체에 열쇠처럼 꽂혀 작용하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막을 통과하는 것과 신경을 건드리는 것까지는 말씀드릴 수 있는데, 그 안쪽은 아직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정유가 많으면 빠른 약"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읽으시면 이런 규칙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 정유가 많다 = 빨리 듣는다 = 급할 때 쓰는 약.

그렇지 않습니다.

세신이라는 약재가 있습니다. 정유 성분이 아주 강한 약재입니다. 그런데 이 약을 저는 오래된 문제에 씁니다. 급한 불을 끄는 자리가 아니라, 길게 끌어온 자리입니다. 경우에 따라 기간을 길게 잡기도 합니다. (다만 세신은 양과 기간을 특히 조심해서 정해야 하는 약재이고, 그래서 혼자 판단하실 약이 아닙니다.)

빠른 길을 가졌다고 빠른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이 열리는 속도와, 그 약이 몸에서 맡는 일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정확히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성분이 어느 길로 가는지는 그 성분의 성질이 정하고, 그 약재를 어디에 쓸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두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편하지만, 편한 만큼 틀립니다.

그래서 같은 약재가 여러 시간대를 갖습니다

감초복령 같은 약재가 "먹자마자 느껴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 계열입니다.

감초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감초의 잘 알려진 성분은 글리시리진 — 단맛을 내는 그 성분이고, 당이 붙은 형태입니다. 사람의 장 세포로 재 보면 이 형태는 거의 통과하지 못합니다. 대장까지 내려가 세균이 당을 떼어 줘야 비로소 몸에 들어옵니다. 느린 길입니다.

그런데 같은 감초 안에, 당이 떨어진 형태의 성분들은 소장에서 그냥 통과합니다. 같은 실험에서 그렇게 갈렸습니다. 그리고 감초 뿌리에는 정유 성분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감초 한 첩은 시간대가 하나가 아닙니다.

  • 삼키는 순간 — 정유가 코와 입, 감각신경을 건드립니다
  • 소장을 지나며 — 당이 떨어진 성분들이 막을 통과합니다
  • 몇 시간 뒤 — 대장에서 세균이 당을 떼어 낸 몫이 뒤늦게 들어옵니다

같은 약재인데 도착하는 때가 셋입니다. 그리고 먼저 온 것이 나중 올 것의 조건을 바꿔 놓습니다. (한약에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 감초 이야기)

이것이 제가 한약의 작용을 한 줄로 그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입구가 여럿이고, 시간이 어긋나고, 서로를 건드립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언제부터 느끼셨는지를 묻습니다

"언제부터 느껴지셨습니까"를 묻습니다. 먹자마자였는지, 몇 시간 뒤였는지, 며칠 뒤였는지 — 이 답이 어느 길이 열렸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빠른 반응을 효과의 크기로 읽지 않습니다. 빨리 느껴진다고 잘 듣는 약이 아니고, 며칠 걸린다고 약한 약이 아닙니다. 다른 길이 열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달이는 방법이 여기에 걸립니다. 정유 성분은 열에 날아갑니다. 오래 세게 달이면 빠른 몫이 줄어듭니다. 어느 몫을 살릴지에 따라 달이는 법이 달라집니다.


먹자마자 느껴진다는 말은 기분 탓이 아닙니다. 약재 하나가 여러 성분을 갖고 있고, 성분마다 가는 길과 도착하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안다고 해서 그 약이 무슨 일을 할지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신처럼 빠른 길을 가졌으면서 오래 걸리는 자리에 쓰는 약도 있습니다.

한약을 성분표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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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 서울 광진구 자양동 · 구의역 4번 출구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단독 저서 《몸을 돌려놓는 한약》 · 《검사 밖의 몸》 ·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 · 직접 쓴 글 284편

이력 펼쳐보기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몸을 다층으로 보고, 환경 변화에 적응해 돌아오는 힘(회복 탄력성)을 살피며, 적응이 안 될 때는 몸 안의 환경 쪽을 손대는 것 — 이 세 관점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단독 저서로 《과학의 눈으로 읽는 한의학》(2026), 《검사 밖의 몸》(2026), 《몸을 돌려놓는 한약》(2026) 세 권을 썼습니다. 첫 책은 한약이 몸 안에서 어떤 길을 지나는지를 성분과 기전의 이름까지 따라가며 설명했고, 두 번째 책은 검사는 정상이라는데 여전히 불편한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여섯 갈래로 나누어 살폈습니다. 세 번째 책은 그 몸이 어디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지를 자율신경, 만성 대사성 질환, 만성 통증, 여성의 몸, 아이와 청소년, 노년기, 낫지 않는 병의 일곱 갈래로 봅니다.

이 글을 쓴 곳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자양로 46, 오띠모빌딩 2층 201호)에 있습니다. 구의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7분입니다. 자율신경·만성통증·난치질환처럼 검사에서 잘 잡히지 않는 불편을 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