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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혈액을 안 거치고 뇌로 가는 길 — 장에는 전화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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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감수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원장

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대개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삼킨다 → 장에서 흡수된다 → 피를 타고 온몸에 퍼진다 → 표적에 도착한다.

틀린 그림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 길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이 그림에 안 나오는 길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장은 소화만 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장에는 신경이 아주 많습니다. 소화를 조절하는 신경이 장벽을 따라 촘촘히 깔려 있고, 그중 상당수가 뇌로 올라가는 선과 이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는 보통 뇌가 장에 명령한다고 생각합니다. 긴장하면 배가 아픈 것처럼요. 그런데 선은 양방향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장에서 뇌로 올라가는 신호가 훨씬 많습니다.

장은 뇌에 보고하는 기관이기도 합니다.

그 선은 혈액을 거치지 않습니다

여기가 핵심입니다.

무언가가 장에 닿아 그 신경을 건드리면, 신호는 신경을 타고 곧장 올라갑니다. 흡수될 필요가 없습니다. 피에 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전화선을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길은 빠릅니다. 흡수와 운반이라는 단계를 통째로 건너뜁니다.

그리고 이 길로 가는 신호는 혈액을 아무리 뒤져도 안 잡힙니다. 성분을 재는 방식으로는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혈중 농도만 보고 "이 약은 양이 적어서 별일 못 한다"고 말하면, 이 길이 통째로 빠집니다. (한약은 왜 듣는가 — 농도의 역설)

그 자리에서 문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장의 점막을 이루는 세포에는 문(채널)이 있습니다. 어떤 성분은 흡수되기 전에, 그 자리에서 이 문을 직접 두드립니다. 세포가 반응하고, 그 반응이 다시 옆의 신경을 건드립니다.

아직 몸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일이 시작된 셈입니다.

그래서 먹자마자 느껴집니다

"약을 넘기자마자 속이 편해지는 느낌이 나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기분 탓으로 넘기지 않습니다. (먹자마자 느껴지는 약이 있습니다)

배당체 성분이 대장까지 내려가 세균을 만나려면 몇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 안에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장의 신경을 타는 길과 점막의 문을 두드리는 길은 그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같은 약인데 도착하는 때가 다릅니다. 먼저 오는 몫이 있고, 뒤에 오는 몫이 있습니다.

이 길이 왜 중요한가

저에게 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자율신경이 흔들린 분들을 자주 뵙습니다. 검사는 정상인데 잠이 안 오고, 가슴이 뛰고, 소화가 안 되고, 긴장이 안 풀립니다. (자율신경은 하나의 스위치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장을 다루는 것이 왜 도움이 되는지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장이 좋아져서 소화가 편해지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장에서 뇌로 올라가는 선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장의 상태가 그 선을 타고 위로 보고됩니다. 장이 계속 시끄러우면 위에서도 그 신호를 계속 받습니다. 반대로 장이 조용해지면 올라가는 신호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긴장이나 불면으로 오신 분께도 장을 묻습니다. 소화기 증상이 없어도 묻습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아는 선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장에 뇌로 이어진 선이 있고, 그 선이 혈액을 거치지 않는다 — 여기까지는 생리학이 다루는 내용입니다. 이 선을 의학에서는 미주신경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한약 성분이 그 선의 어느 지점을 얼마나 건드리는지는 아직 하나하나 밝혀지는 중입니다. 저는 이 길이 진료에서 실제로 쓰인다고 보지만, 어느 약재가 어느 신경을 얼마만큼 건드리는지까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를 건너뛰지 않으려고 합니다. 길이 있다는 것과, 그 길로 무엇이 얼마나 가는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언제부터 느껴지셨습니까"를 묻습니다. 먹자마자였다면 이 길이 열린 것이고, 며칠 뒤였다면 다른 길입니다.

소화기 증상이 없어도 장을 묻습니다. 잠, 긴장, 두근거림으로 오셔도 묻습니다.

혈중 농도가 낮다는 것을 약이 약하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재는 방식이 그 길을 못 잡을 뿐일 수 있습니다.


먹은 약이 흡수돼서 피를 타고 퍼진다 — 이 그림은 맞습니다. 다만 전부는 아닙니다.

장에는 뇌로 곧장 이어진 선이 있고, 그 선은 피를 거치지 않습니다. 한약이 몸에서 하는 일을 한 줄로 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한약은 무엇을 하는가)


참고한 자료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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